보관함/시

아직도 해가 뜨지 않아서, 허수경

fromk 2015. 11. 27. 01:14

가만히 종이를 내놓고 너를 그려본다

너의 얼굴을 기억하기 위하여 그려본다


너의 얼굴 자리에다 기타를 그려넣는다

너의 코에다 입에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음악을 그려넣는다

아, 너의 얼굴은 음악을 기다리는 기타가 되어 있다


이 종이를 아주 푸른 물결이 있는 곳까지 가져가야겠다

순정의 입술로 태양이 가만가만 젖은 눈을 만져주던 물결에게로

그리고 이 세기가 끝나면 내 차가운 심장을 너에게 주리


하얀 입김으로 달리던 배와 기차가 있었던 세기에

달리는 모든 것을 믿어서 대륙을 횡단하던 모험가와 군인들과

새로 태어난 기계들과 기계 옆에서 가난한 감자를 먹던 여자들의 입속까지

다 음악으로 만들고 나면 너의 얼굴이 태어나겠지


아직 해가 뜨지 않아서 긴 밤의 바람을 듣는다 바람은 순간마다 새로

태어나는데 우리들은 아직 긴 발을 가진 신의 무르팍에 기대어

졸고만 있다 전 세기의 모든 순환을 다 경험한 횡단철도의 철로들이

마지막 숨을 쉬면서 이슬에 젖는데

나는 태어나지 않은 음악을 너의 얼굴로 가만 들여다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