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잠든 눈을 만져본 적이 있다-태내(胎內), 김경주
당신은 먼저 화구를 펴고 그 저녁의 공기를 그려 넣기 시작한다 그러곤 구름 속을 서성이는 그늘이 공중으로 내려오고 있는 색과 먼 들판 끝에 서 있는 집 창문이 묽게 떠는 소리들을 그 저녁의 공기에 입혀준다 그러곤 저녁이 오면 입을 벌리고 죽어가는, 비린 벌레 몇 마리를 바람 가운데 흘려준다 벌레의 몸에서 나오는 축축한 물기들을 어떤 빛깔의 내부로 데려갈까 고민한 뒤 붓을 놓고 지그시 눈을 감는 당신은 이제 천천히 어둠이 고인 미끄럼틀 안에서 궁륭처럼 구부러져 자는 소년을 그려 넣기 시작한다 그러면 나는 아직 사람을 그릴 때는 제일 먼저 눈부터 그려 넣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고 당신의 그림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고 조용히 당신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그것은 내가 아직 이 세상에 나오기 전, 부모가 줄곧 나를 상상하며 하던 일이라고 말해주었어야 했다 어둠 속 베게 하나에 나란히 누워, 서로의 얼굴을 손으로 더듬으시며 그려보곤 했을, 나의 눈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아가 우리는 네가 나오기 전, 없는 너의 눈을 오래 그려보았단다 그리고 우리가 언젠가 네 속으로 돌아가고 나면 너는 우리 눈을 그보다 더 오래 들여다보아야 한단다 죽은 아이를 안고 놀고 있는 부부의 목젖은 음악 속에서 기어 나오고 있는 사람을 닮는다 당신들은 이미 귀신이라는 사실을 그때 말해주었어야 했다
물속의 등고선들이 노을에 비친다 노을이 바람에 섞여 투명해지는 시간이다 그 시간에 물든 바람의 혈흔을 그리는 사람의 붓은 늘 젖어 있다 당신은 어두운 물감을 녹여 내 눈의 안쪽에 그 저녁의 시간을 그려 놓고 나는 우리의 발밑으로 온 무겁고 딱딱한 그늘 안으로 몇 개의 물기를 그려 넣는다 눈물은 눈의 내장일까 눈 안은 너무 헐렁해서 눈물은 담을 육체가 없다며 웃는다 사랑이라며 당신은 헐렁한 내 손가락들을 만지며 잠든다 우연히도 너는 눈을 뜨고 태어났구나 그런데 확실하게도 너는 먼 훗날 눈을 뜨고 죽을 거야
바람이 자신을 지울 공간 하나를 찾으려고 당신의 몸 안에서 울고 있다 얘야 너도 언젠가 너와 같은 울음소리를 가진 사람을 만난단다 분별할 수 없는 꽃들의 통로처럼 나는 그것을 어떤 불귀로 그려 넣어야 할까? 그것은 아름다운 물고기의 눈을 보면 쉽게 먹지 못한다는 인간의 무늬, 계곡에서 자는 사람, 나비의 묘지들, 어둠 속에서 사라져버린 술래, 돌연한 무미(無味), 적막. 언젠가 나는 당신의 잠든 눈을 가만히 만져본 적이 있다고 고백해야겠다 구름의 내부를 천천히 거닐고 있는 나의 붓은 지금 혼수(昏睡)의 상태다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내 몸 안으로 기어 들어오고 있는 인간 하나 보고 있다면 나는 지금 당신의 눈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