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관함/시 2015. 5. 21. 21:09

숨소리의 문장, 채호기

긴 호흡기관의 층계를 올라오는 숨소리

닫힐 듯 간신히 열리는 숨소리

정체 모를 타인의 숨소리

와 합쳐지고 좀 전의 숨소리

와 아득한 기억의 숨소리

가 뒤섞여 숨소리의 문장을 이룬다.


어떤 단어는 들판의 풀잎에 돋아나

차가운 이슬방울로 모래 위에

떨어져 천천히 스며든다.

어떤 단어는 이마의 땀구멍을 비집고

올라와 미간을 거쳐 코와 눈

사이의 계곡을 천천히 흘러내린다.


어떤 단어는 바람이 되어 창틀의 소리를 내다가

멀리 황량한 들판의 소리를 낸다.

어떤 단어는 끈적끈적한 어둠으로

덩어리가 되어 눈꺼풀을 무겁게 짓누른다.

어떤 단어는 안개가 되어 공기를

포옹하고 연인의 심장을 포옹한다.


아! 사랑이란 단어

백사장 위에 하얀 조가비

주머니에 들어 손가락에 만져지는 글자.

아! 바다, 파도라는 단어와 한 문장을 이루어

밤하늘의 별자리 같은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는 사랑.


사랑이란 단어를 듣기 위해

책장을 여는 순간 무거운

관 뚜껑이 열린다. 책이 관이라니!

긴 호흡기관의 층계를 올라오는

숨소리. 정체 모를 타인의 숨소리와 뒤섞인

숨소리의 문장이 들린다.

'보관함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 안현미  (0) 2015.07.20
발레리나, 최현우  (0) 2015.02.20
나선의 감각-물의 호흡을 향해, 이제니  (0) 2015.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