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관함/시
2015. 10. 1. 01:14
살부림, 김륭
그대를 사랑한 후 알았다
단말마의 고통을 위해 필요한 건 칼이 아니라
꽃이다,
칼보다 먼 곳에 살던 꽃이 쓰ㅡ윽 걸어들어오면서
내게도 급소가 생겼다
모든 칼은 한때 꽃이었다 바람의 발바닥을 도려내던 머리맡에서 피보다 진한 눈물을 도굴했다 나는, 그대 몸 가장 깊숙한 곳에서 방금 태어났거나 이미 죽어나간 구름이다
해바라기 꽃대에 목을 꿴 그대 눈빛을 보고 알았다 바람에 등을 기댈 수 없는 꽃은 칼이 되는 법 내 사랑은 구름 속에 꽂혀 있던 당신을 뽑아 나무의 허리를 베고 새의 날개를 토막ㅡ치면서 시작된 것이다
칼로 물 베기란 붉은 살을 가진 물고기 비늘에 필사된 천지검법의 하나,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상대를 바닥에 눕히는 필살기여서 죽어도 사랑한다는 독침이 꽂혀 있는 애무의 마지막 초식이어서
변태가 불가능한 체위다 지상의 모든 사랑은 꽃의 신경조직과 무당벌레의 눈을 가졌다 늘 손잡이 없는 칼을 품고 다니며 축지법에 능통한 법 훌쩍, 한 손의 고등어처럼 그대와 내가 다녀온 하룻밤의 별을 식히는 동안 절정을 맞는 것이다
그대 잠시 한눈파는 사이 급소가 사라졌다
한 번 더 목숨을 버릴 때가 온 것이다
적(敵)의 급소가 곧 나의 급소다,
장미 한 다발 사들고
칼 받으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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