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관함/시 2015. 10. 19. 01:14

물속에서, 진은영

가만히 어둠 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내가 모르는 일이 흘러와서 내가 아는 일들로 흘러갈 때까지

잠시 떨고 있는 일

나는 잠시 떨고 있을 뿐

물살의 흐름은 바뀌지 않는 일

물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푸르던 것이 흘러와서 다시 푸르른 것으로 흘러갈 때까지

잠시 투명해져 나를 비출 뿐

물의 색은 바뀌지 않는 일


(그런 일이 너무 춥고 지루할 때

내 몸에 구멍이 났다고 상상해볼까?)


모르는 일들이 흘러와서 조금씩 젖어드는 일

내 안의 딱딱한 활자들이 젖어가며 점점 부드러워지게

점점 부풀어오르게

잠이 잠처럼 풀리고

집이 집만큼 커지고 바다가 바다처럼 깊어지는 일

내가 모르는 일들이 흘러와서

내 안의 붉은 물감 풀어놓고 흘러가는 일

그 물빛에 나도 잠시 따스해지는


그런 상상 속에서 물속에 있는 걸 잠시 잊어버리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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