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관함/시
2015. 10. 9. 01:14
나의 친애하는 단어들에게, 심보선
단어들이여,
선량한 전령사여,
너는 내 사랑에게 "저이는 그대를 사랑한다오" 전언해주었고
너는 나에게 "그녀도 자네를 사랑한다네" 귀띔해주었지.
그리고 너는 깔깔거리며
구름 위인지 발바닥 아래인지로 사라졌지.
사랑하는 이의 웃음소리를 졸졸 따라다니며
나는 기쁨에 겨운 생을 살았지.
단어들이여,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름이여,
그 아들과 딸의 이름이여,
너는 태어나자마자 어찌나 빨리 늙어가던지.
너를 보면 곧바로 묘비 위의 이름을 알아채게 되지.
사랑하는 이들의 사그라지는 이름을 읊조리며
나는 슬픔에 겨운 생을 살았지.
단어들이여,
내가 그늘을 지나칠 때마다 줍는 어둠 부스러기들이여,
언젠가 나는 평생 모은 그림자 조각들을 반죽해서
커다란 단어 하나를 만들리.
기쁨과 슬픔 사이의 빈 공간에
딱 들어맞는 단어 하나를.
나의 오랜 벗들이여,
하지만 나는 오늘 밤 지상에서 가장 과묵한 단어.
미안하지만 나는 그대들에게서 잠시 멀어지고 싶구나.
나는 이제 잠자리에 누워
내일을 위한 중요한 질문 하나를 구상하리.
영혼을 들어 올리는 손잡이라 불리는
마지막 단어만이 입맞춤의 영광을 누릴 수 있다는
?
로 끝나는 질문 하나를.
'보관함 >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주의 저수지, 신용목 (0) | 2015.10.10 |
---|---|
너의 이마 위로 흐르는 빛이, 이제니 (0) | 2015.10.08 |
동지(冬至), 강성은 (0) | 2015.10.06 |